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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희 칼럼] 멋진 하루를 기대한다는 것해마다 지천으로꽃피는 봄이 되면 만나는 친구들이 있다. 만남이 약속된 날 아침. 일찍 기차를 타야 하는 부담 때문이었을까 마음이 분주하다. 조급한 마음 때문이었던지 국그릇을 엎어버린다. 바닥이 국물로 흥건하다. 순간, “아침부터 왜 이래?”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걸 꾹 참는다. 그 후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기차역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러 가서 단 몇 초 차이로 눈앞에서 놓쳐버리고, 지하철역에서 기차역으로 이동 중에는 예약해 놓은 기차가 떠나버렸다. 누구나 이런 날을 한 번쯤 경험하지 않았을까? 어쩐지 일이 꼬이는 것 같고, 묘하게 뭔가 풀리지 않는 기분이 든다. 아침에 국그릇을 엎은 게 무슨 큰일이라고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일까? 단어는 생소하지만, 뜻은 우리에게 친숙한 ‘속신(俗信)’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에서는 ‘오래전부터 민간에 전해져오는 미신적인 종교 관습’이라고 나오지만, 오늘날엔 종교적인 것보다는 그날 하루가 어떠할지에 대한 가벼운 징조 정도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나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것에 나름 이성적으로 대처한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속신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깨닫는다. 생각해 보면, 국그릇을 엎어버린 것은 시간에 쫓기고 있던 나의 부주의 때문이다. 내가 건너려고 하면 건널목의 파란불이 빨간불로 바뀌는 것이 다반사인 것처럼 지하철을 놓치는 것은 흔히 있는 일. 예약한 열차를 이용하지 못한 것은 시간을 여유 있게 안배하지 않은 내 실수다. 어느 것도 이유 없이 꼬였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다행히 모든 것이 착착 들어맞는 것 같은 날이 있으면 그렇지않은 날도 있는 법이다. 굳이 의미를부여할필요도 없건만, 우리의 생각은 부정적인 일은 오래 기억하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어떤 생각을 할 때 강한 감정이 실린다는 것은 당신이 그 생각을 현실로 아주 급속하게 불러들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 뉴비기닝, 에스더 & 제리 힉스 무엇이 잠깐이지만 나를 불안하게 했을까? “아침에”라는 시간에 내가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순간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일깨운다. 그리고 “오늘 내가 얼마나 멋진 하루를 보낼지 기대해 봐.”라며 어떤 하루를 보낼 것인지 의식적으로 생각한다. <뉴비기닝>에서 생각은 자신의 지배적인 의도에 의해서 도출되고, 나의 의도에 초점을 맞추면 결국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부정적인 생각에서 긍정적인 생각으로 적극적으로 옮겨가는 것만으로도, 이미 불안감은 사라지고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나는 그날 친구들과 그 어느 해 보다 즐겁게 봄꽃을 즐기다 왔다. 사실 지하철과 KTX를 놓쳐 잠깐 당황하긴 했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아침에 있었던 작은 사건의 영향에서 이미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평온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날 하루 의도한 대로 목적지에 잘 도착할 것과 즐거운 여행으로 마무리될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어떤 순간이라도 의식적으로 생각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삶을 적극적으로 바라보고 긍정적으로 대하는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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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희 칼럼] 멋진 하루를 기대한다는 것해마다 지천으로꽃피는 봄이 되면 만나는 친구들이 있다. 만남이 약속된 날 아침. 일찍 기차를 타야 하는 부담 때문이었을까 마음이 분주하다. 조급한 마음 때문이었던지 국그릇을 엎어버린다. 바닥이 국물로 흥건하다. 순간, “아침부터 왜 이래?”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걸 꾹 참는다. 그 후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기차역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러 가서 단 몇 초 차이로 눈앞에서 놓쳐버리고, 지하철역에서 기차역으로 이동 중에는 예약해 놓은 기차가 떠나버렸다. 누구나 이런 날을 한 번쯤 경험하지 않았을까? 어쩐지 일이 꼬이는 것 같고, 묘하게 뭔가 풀리지 않는 기분이 든다. 아침에 국그릇을 엎은 게 무슨 큰일이라고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일까? 단어는 생소하지만, 뜻은 우리에게 친숙한 ‘속신(俗信)’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에서는 ‘오래전부터 민간에 전해져오는 미신적인 종교 관습’이라고 나오지만, 오늘날엔 종교적인 것보다는 그날 하루가 어떠할지에 대한 가벼운 징조 정도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나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것에 나름 이성적으로 대처한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속신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깨닫는다. 생각해 보면, 국그릇을 엎어버린 것은 시간에 쫓기고 있던 나의 부주의 때문이다. 내가 건너려고 하면 건널목의 파란불이 빨간불로 바뀌는 것이 다반사인 것처럼 지하철을 놓치는 것은 흔히 있는 일. 예약한 열차를 이용하지 못한 것은 시간을 여유 있게 안배하지 않은 내 실수다. 어느 것도 이유 없이 꼬였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다행히 모든 것이 착착 들어맞는 것 같은 날이 있으면 그렇지않은 날도 있는 법이다. 굳이 의미를부여할필요도 없건만, 우리의 생각은 부정적인 일은 오래 기억하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어떤 생각을 할 때 강한 감정이 실린다는 것은 당신이 그 생각을 현실로 아주 급속하게 불러들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 뉴비기닝, 에스더 & 제리 힉스 무엇이 잠깐이지만 나를 불안하게 했을까? “아침에”라는 시간에 내가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순간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일깨운다. 그리고 “오늘 내가 얼마나 멋진 하루를 보낼지 기대해 봐.”라며 어떤 하루를 보낼 것인지 의식적으로 생각한다. <뉴비기닝>에서 생각은 자신의 지배적인 의도에 의해서 도출되고, 나의 의도에 초점을 맞추면 결국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부정적인 생각에서 긍정적인 생각으로 적극적으로 옮겨가는 것만으로도, 이미 불안감은 사라지고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나는 그날 친구들과 그 어느 해 보다 즐겁게 봄꽃을 즐기다 왔다. 사실 지하철과 KTX를 놓쳐 잠깐 당황하긴 했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아침에 있었던 작은 사건의 영향에서 이미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평온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날 하루 의도한 대로 목적지에 잘 도착할 것과 즐거운 여행으로 마무리될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어떤 순간이라도 의식적으로 생각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삶을 적극적으로 바라보고 긍정적으로 대하는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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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희 칼럼] 삶을 바꿔주는 한 마디, 행동하라“○○ 자격증 공부를 해야 하겠어. 필요한 것 같아.” 이 말을 지인에게 들은 지가 벌써 한참 전이다. 궁금한 마음에 잘하고 있는지 물어보자 대답이 시큰둥하다. “아니, 아직 시작도 못 했어.바빴거든.” 이 지인은 하고 싶은 일이 많은 만큼 계획도 잘 세운다. 계획대로였으면 무엇인가 벌써 시작을 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그때까지 달라진 게 없다. 왜 시작하지 않았는지 물어보면 어려워 보여서, 시간이 없어서, 다른 일이 생겨서 등등 핑계를 대며 상황을 얼렁뚱땅 넘어간다. 유독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이 있다. 안타까운 점은 이 패턴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수도 있다. 아무리 작은 계획이라 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변화도 결과도 기대할 수가 없다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에는 열정을 쏟아도 행동에는 소극적일 때가 많다. 나 역시 크고 작은 목표를 세웠지만, 머릿속에서 맴돌다 끝난 것을 나열하면 노트 한 장은 가볍게 채울 수 있다. 무엇이 그렇게 주저하게 했을까? 나의 경우는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함이 컸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싫다는 게으름도 작용했을 것이다. 단지 ‘어려워서, 시간이 없어서’라는 핑계 뒤에 숨었을 뿐이다. 적당한 불안과 두려움을 오히려 동력으로 삼아 성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세월만 보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행동하지 않으면 이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게으름을 극복하는 방법도 몸으로 움직이는 것밖에 없다. “행동하면 자신감과 용기가 생긴다. 두려움을 정복하고 싶다면 집에 앉아서 생각만 하지 말고, 나가서 바쁘게 움직여라.” - 데일 카네기 “행동하라.” 내가 좋아하는 말이기도 하며 불안과 게으름을 떨쳐버리기 위해 실제로 삶에 적용하는 부분이다. 언젠가 본 책에서는 근심의 대상과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것이라도 좋으니 뭔가를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문제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할 때 나는 누군가를 만나 가벼운 대화를 한다거나, 산책을 평소와 다른 장소를 선택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환경에 약간의 변화를 주는 것만으로도 풀리지 않는 숙제에 대한 답을 얻고 불안감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몸이 움직이니 게으름이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 삶의 변화는 생각과 행동이 조화롭게 이루어질 때 다가온다. 아는 것이 많아 그 사람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다. 새로운 것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게으름을 이기는 방법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무엇이든 하면 된다. 그 행동이 결국 내가 원하는 일에 다가갈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열 개의 계획보다 한 번의 실천이 우리 삶을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만들고, 오늘과 다른 내일로 안내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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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희 칼럼]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대‘인류세’라고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인류세’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던 곳은 몇 년 전 과학예술비엔날레 미술관에서였다. 많은 전시품과 해설이 있었지만, 나로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전시회로 기억된다.그 당시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뇌리에 깊이 새겨진 하나의 단어가 바로 ‘인류세’이다. 얼 C. 엘리스의 저서 <인류세>에 용어에대한 설명이 나온다. 인류세라는 단어는 2014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등재되면서 다음과 같이 정의되었다. “현재의 지질학적 시대. 인간의 활동이 기후와 환경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간주되는 시대”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지질시대의 명칭은 아니다. 국제층서위원회(ICS)에서 검토 중이지만 하나의 지질시대로 구분하기에는 그 기간이 짧다는 의견이 많다. 45억 년 지구 역사에서 어느 한 종(種)이 지구 환경에 지금처럼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지구 환경에 극적인 변화가 있었던 사건을 대멸종이라 하는데 지금껏 5번의 대멸종이 있었다. 소행성의 충돌, 화산 활동, 기후 변화에 따른 빙하기 등을 원인으로 꼽는다. 언젠가 다가올 6번째 지구 대멸종의 원인은 인간이 될 것이라고 한다. 무분별한 개발과 산림 파괴, 화석연료 사용, 산업혁명 이후 눈부신 경제, 과학, 문화 발전의 이면에는 지구의 말 없는 희생이 있었다. 이미 탄소 배출량은 위험수위를 넘어갔으며 기후 변화로 인한 기온 상승 등 오랜 시간 축적된 문제의 씨앗들이 무서운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나 역시도 그 원인을 제공하는 인간 중의 한 사람임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텀블러를 들고 다닌다고 도움이 얼마나 될까? 자가용 대신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하는 작은 일들이 과연 도움이 되기는 되는 걸까? 회의가 들 때도 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지구에 대한 인간의 직무유기다. 우리는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간간이 고래나 거북이의 뱃속에 플라스틱이며 각종 쓰레기가 가득 찬 채 발견되는 뉴스를 접할 때면 정말 울고 싶어진다. 인간은 무슨 자격으로 지구의 모든 생명체 위에서 군림하며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인지 이 오만함이 무섭다. 지구 최대의 재앙은 진화한 인류가 아니었을까 싶다. 다행히 현재 전 세계적으로 자연 생태계 파괴와 기후 변화에 따른 위험성을 인식하고 함께 해법을 찾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온실가스 배출량의 단계적 감축안을 담은 파리기후협약 등을 들 수 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미래의 인류를 위한 대범한 결정들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최근 지구의 생명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것이 ‘인류세’를 다시 떠올리는 계기였다. 지구의 생명에 관한 내용으로 보는 내내 인류의 암울한 미래가 예견된 것 같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나마 한 가닥 위로의 말은 인간은 지구의 변화를 이해하는 최초의 종이라는 것. 또한, 이를 바로 잡기 위해 뭘 해야 하는지 안다는 것이다. 아직 우리와 지구의 미래는 희망이 존재한다는 말이 아닐까? 6번째 대멸종은 실현되지 않을 가능성인 채로 남기를 바라며, 과연 우리가 미래의 지구와 인류를 위해서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새로운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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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희 칼럼] 기억,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나는 가끔 엄마와 오래전 함께 겪었던 한 사건을 두고도 서로 다른 기억 때문에 실랑이를 벌이곤 했었다. 엄마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나 역시 주장을 꺾지 않고 팽팽히 맞서고 결국엔 엄마는 화를 참지 못하고 드러눕고야 만다. 나는 그때가 되어서야 사과를 하고 상황은 종료된다. 따지고 보면 누구의 기억도 정확하다고 할 수 없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고집스럽게 우겼을까 싶다. 오기였을까?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받고 싶었던 것일까? 지금의 나라면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 “그래요. 당신 말이 다 맞습니다.”라고 하고 말았을 것이다. 말씨름을 싫어하는 개인적 성향 탓도 있겠지만 이제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다 믿지도 않고 정확한지 자신할 수도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내 생각이 다를 수도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지금 내 머릿속에 있는 기억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내 기억은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오해를 만들고 다툼을 불러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왜 우리는 같은 상황에서 주고받은 대화를 시간이 지나면 각자 다르게 떠올리게 되는 걸까? 기억의 오류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몇 년 전 동해로 가족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내 머릿속에 저장된 동해 여행은 분명 가을이다. 가을 하늘, 바람, 바다로 각인되어 있는데, 최근에 여행을 다녀온 계절이 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계절까지 통째로 바꿀 수 있다니. 사람의 기억이란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작가 박지영의 저서 <기억은 변한다>에는 “기억을 회상한 후 다시 저장하는 과정(재응고화)에서 정보의 삭제나 추가, 강조와 같은 변형이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의 기억은 재구성된 기억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의 기억은 다시 떠올릴 때 그대로 출력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저장되어 있던 정보에 새로 보고 들었거나 자신의 상상까지 더하여 재구성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말이다. 이를 “기억의 재응고화”라고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궁금증이 풀리면서 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되는지 이해를 해 본다. 사람이 이상한 게 아니라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진 뇌인 것이다. 매 순간을 영화처럼 기록해 놓을 수 있다면 처음부터 분란이 일어날 일도 없겠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언제든 내 기억과 생각이 온전하지 않음을 받아들이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면 어떨까? 생각해 보면 말의 진실 여부를 두고 공방을 벌일 때가 많았다. 대부분 현재에 아무런 영향력도 미칠 수 없는 말 몇 마디를 두고 설전을 벌인다. 이미 각자의 머릿속에서 적당히 변형이 일어났을 기억을 두고 마음이 상해가면서 말이다. 그냥 지기 싫고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오늘 알게 된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좀 더 현명하게 대처하지 않았을까 싶다. 엄마가 “그래 너 잘 났다.”라고 화를 내며 드러눕게 만들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요. 당신 말이 다 맞는 것 같아요.” 상대방을 가장 온화하게 이기는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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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희 칼럼] 인연은 강물처럼 흐른다“저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몇 달 전부터 찾기 시작한 카페의 직원이 주문을 받으면서 말한다. “어머, 왜요? 서운해서 어떡해요.” “좀 멀리 이사 가게 됐어요. 손님께는 이야기하고 가야 할 것 같아서 처음 말씀드려요.” “얘기해줘서 감사해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라며 서운한 마음 가득 담아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작년 긴 겨울이 시작될 무렵부터였나 보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쯤이면 나는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다. 따뜻한 커피를 주문하고 통유리창 너머 짙어가는 어둠을 벗 삼아 내 안의 고독과 만났고 글을 썼다. 그렇게 시간이 쌓여 카페 직원과 반갑게 인사하고, 보이지 않으면 궁금한 사이로 시나브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깨닫는다. 그런 직원이 자신의 부재 이유를 미리 알려주는 마음 씀씀이가 마냥 감사하다. 그래,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인연이란 생각이 든다. 모든 만남이 절절할 수도, 많은 사연을 가질 필요도 없지 않을까? 우린 좋은 인연을 이야기할 때 시간과 비례해서 말하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였는지로 그 깊이와 특별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인연이 시간과 비례하지도, 내 필요에 따라서 가치를 따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뿐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로 멀어지기도 하고, 놀랄 정도로 갑자기 가까워지기도 한다. 관계의 변화를 예측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살다 보면 무수한 변수가 우리의 삶 속에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각자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있으며 그 세상과 세상이 만나는 교집합에서 서로 다른 생각이 만나기 때문에 내 의도가 전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강물이 물줄기를 따라 유유히 흘러 큰 바다에 이르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의 만남 또한 물결을 타고 흘러간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끊임없이 변하고 우리도 변화를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산도 자의든 타의든 십 년이면 변한다고 하는데, 우리의 인간관계 또한 세대교체를 하는 것처럼 누군가는 저편으로 밀려나고 누군가는 새로이 내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맹자는 “산속의 좁은 길도 계속 다니면 길이 만들어지지만, 다니지 않으면 풀이 우거져 길이 막히게 된다.”라고 했다. 원래는 학문을 비유해서 한 말이지만 인연에 빗대어도 한치 틀림이 없는 것 같다. 내가 관심을 주는 인연이 자랄 수밖에 없다. 세상에 의미 없는 만남이 어디 있겠는가? 어쩌면 오늘 지금 내가 마주한 그 누군가가 가장 중요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설혹 다시 마주할 일이 없어도 그 작은 인연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 진심이 좋은 인연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만남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줄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는가? 마지막 인사를 건네던 카페 직원과의 인연도 이것으로 끝이라고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어디에서 또 어떤 인연으로 만나질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껏 내 생의 물결 위에 함께하고 있는 사람은 그 자체로 감사하고, 새로 다가오는 인연 또한 마음을 열어 환영한다. 그리고 이제는 나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역시 감사와 좋은 일이 함께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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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희 칼럼] 쉼이 필요할 때 나는겨울 동안 잠시 쉬었던 새벽 운동을 몇 달 만에 다시 시작한다. 오랜만에 찾은 공원에서 시선을 끄는 것이 있다. 그것은 소나무. 이 공원에 소나무가 이렇게 많았던가? 그 존재조차 기억에 없었던 소나무를 새삼스레 깨닫게 된 것은 소나무로부터 얻는 “쉼” 때문이다. 산과 숲을 좋아하는 나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다녀온다. 소나무는 우리나라 산 어디에서나 자라고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이다.나 역시 소나무가 우거진 숲 가운데로 난 길을 걷는 그 시간이 좋다. 그날 찾은 숲은 오랜 세월 그 자리의 주인이었음을 말해주듯 두 팔을 벌려도 닿지 않는 아름드리 소나무로 가득했다. 끌리듯이 나무를 온몸으로 안아본다. 가만히 가슴을 밀착시키고 한쪽 볼도 거친 소나무껍질에 살포시 올려놓으며 두 눈을 조용히 감는다. 계절은 늦가을로 그늘이 드리워져 차가울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너무나 포근했고 평화로운 느낌이 전해졌다. 나무와 맞닿은 가슴의 눌림이 주는 느낌은 엄마에게 업히거나 안겼을 때 아기가 받는 편안함과 비슷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마음의 긴장이 스르르 풀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세상과 잠시 분리되는 것 같았고 내가 소나무를 끌어안은 것이 아니라 소나무가 나를 다정히 안아 주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날 이후 산과 숲, 어디든 소나무를 보면 살포시 안아보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누군가는 그것도 명상의 일종이라고 말을 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다. 일상에서 벗어나 숲을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벌써 몸은 이완되기 시작하니까 말이다. 현대는 명상의 시대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나의 행동이 명상 수련의 한 형태인지 아닌지는 나도 분명하게 말할 수가 없다, 그것보다는 마음을 위로받고 잠시라도 쉼을 하고 재충전을 할 수 있었음이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 누구나 긴장으로 가득했던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나만의 장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쫓기듯 일상을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쌓이는 스트레스를 적절히 풀어주어야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 문요한은 저서 <오티움>에서 “성인이 되면 힘들 때마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을 수 없다. 스스로 위로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어른이라는 이유로 말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여러 위치와 역할 때문에 어디에도 쉽게 손을 뻗지 못한다. 그리고 삶의 많은 순간을 혼자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이럴 때 나를 온전히 쉬게 하고 행복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다, 산, 명상, 운동, 독서 등 어떤 활동이 되었든 좋다. 내가 집중할 수 있고, 그 순간 진정 편함을 느끼고 즐거울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쉼이고 재충전의 계기가 된다. 사람마다 쉼의 형태는 다르다. 쉼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기고 기뻐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을 내게 선물하는 것이다. 내가 좋은 일을 하면 된다. 누구 눈치 볼 것 없다. 내가 숲과 나무에서 쉼을 찾는 것처럼 누구나 일과 쉼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을 찾는 고민을 해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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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희 칼럼] 힘 좀 빼고 살아도 괜찮아얼마 전, 독서 모임에서 책에 대한 나눔을 하던 중, 한 분이 자기가 그동안 온몸에 힘을 잔뜩 주고 살고 있었음을 몰랐었다고 사뭇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매주 경락을 받으며 전신의 근육을 풀고 오지만 다음 주면 근육이 뭉쳐져 있다고 했다. 경락을 해 주시는 분이 궁금해서 물어볼 정도였음에도 정작 자신은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이를 악물고 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신이 온몸에 힘을 주고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고 한다. <출처: 픽사베이> 온몸에 힘을 주고 살면서도 그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긴장된 상태로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도 내 손을 나도 모르게 꽉 움켜잡고 있을지 모른다. 꽉 움켜잡고 있는 것, 그것은 손이 아니라 살면서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즉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하는 작은 일부터 인생의 큰 목표와 지키고 싶은 가치관 등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것들일 것이다. “당신은 왜 가슴에 중압감을 느끼는가? 이 질문에는 표준 정답이 있다. - 자신을 너무 압박하고 있거나, 목표가 이뤄지기만을 안달하며 기다리고 있거나, 뭔가에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힘을 빼라. - 리얼리티 트랜서핑, 바딤 젤란드 누구나 자기만의 인생의 목표와 가치관이 있다. 그 가치의 실현을 위해 우리가 얼마나 노력을 하는지 자신에게 물어보면 누구보다 더 잘 대답하지 않을까 싶다. 나 역시 한때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과감히 습관도 바꾸고 부족함을 느끼는 것을 채우며 살았다. 일상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사소한 일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때도 있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우리는 잘하고 싶고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쏟게 되면 균형이 깨져 버린다. 붙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놓치게 된다는 말처럼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면 의도와는 다르게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날 때가 많다. 왜 그런 결과가 나올까를 생각해 보면 내게 주어진 어떤 일, 목표, 가치관이 너무 중요하다는 생각에 실수나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여유를 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이 경직되면 작은 실수에도 좌절하고 쉽게 포기하기도 하며 다시 시작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되기도 한다. 살면서 깨우치는 것 중의 하나가 있다면 앞만 보고 달린다고, 매일 자신에게 힘내라고 속삭인다고 우리가 원하는 삶에 빨리 닿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한 발 짝 물러나 살짝 힘을 빼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실수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실패했을 때를 한 번쯤 상상해 보는 편이 훨씬 긍정적이고 생산적이다. 실제로 나는 가끔 어떠한 일을 할 때 잘못되었을 때를 그려본다. 과연 잘못되었을 때 얼마나 더 나빠질 수 있는지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두려움이 사라지고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낀다. 힘을 좀 빼고 살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의 시대가 치열한 생의 현장으로 우리의 등을 떠밀어도 너무 힘주어 살지 말자. 그 힘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음을 깨닫고, 생각의 유연함을 기르고 시야를 넓히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힘을 빼고 세상을 바라볼 때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으며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냥 힘 좀 빼고 살아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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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희 칼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나는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이면 거울을 보며 그 속에 비친 나에게 웃어주기도 하고 얼굴을 두 손으로 꼭 감싸고 말을 걸기도 한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삶의 고민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날엔 나도 모르게 한껏 심란한 마음으로 멍하니 보게 된다. 또 어떤 날은 사는 게 한없이 즐거운 사람 마냥 행복해 보이기도 하고 하루하루가 다르게 느껴지지만 “○○야, 사랑한다.” 라는 말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삶이 힘들어도, 사는 게 즐거워도 언제나 나를 사랑함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을 책과 각종 매체를 통해 쉽게 접하고 있다. 행복한 삶도, 자존감을 높이는 것도, 마음의 평온도 자기를 먼저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나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사랑을 하는 것일까? 아니다. 자기 사랑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우리의 인생이 긍정적으로 변할 수 있다” - 루이스 L. 헤이 나는 나를 정말 사랑하고 존중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내가 하는 사랑은 지극히 이기적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예를 들어, 예전보다 살이 붙은 내 모습을 볼 때면 짜증이 스멀거리며 올라와 쳐다보기도 싫었고, 여전히 주변의 비판이나 평가에 쩔쩔매는 내 성격도 참을 수가 없었다. 안 그런 척하는 것뿐이었다. 스스로 생각했을 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다 부정하고 외면하며 나를 사랑한다는 착각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만약 이렇게 변하면, 무엇을 하지 않으면 너를 사랑해 줄게.”라고 강요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자기사랑은 조건이 붙을 수 없는 사랑이다. 내가 어떤 모습이든, 어떤 결점을 가졌든 인정하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괜찮은 모습의 나를 찾아 그 모습만 보여주려는 것을 멈추고 지금 나의 모습을 그저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사람은 관점이 바뀌면 생각과 행동도 달라지게 되어있다. 나를 힘들게 했던 고민은, 단순히 살을 빼겠다는 목표에서 벗어나 건강한 삶을 위해 관리가 필요함을 깨닫고, 적절한 행동들을 삶에 적용해 나가면 될 것이고, 타인은 의외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음을 깨닫는다면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리게 될 것이다. 무엇이든 깨닫는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나의 몸과 마음이 부족하다는 결핍의 관점에서 벗어나 지금 있는 그대로 충분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자기 사랑이다. 혹시 외면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있는가? 그것은 부정하고 외면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꼭 안아주어야 할 또 다른 나의 모습이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 속의 나를 대면하듯이 과연 내 사랑은 어떠한가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선택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면 그날의 모든 것은 사랑으로 빛날 것이다.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 세상의 모든 사랑도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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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희 칼럼리스트] 관계가 스트레스가 되지 않으려면“어디니?”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지인이 던지는 첫 마디는 변함이 없다. 짧은 순간 어떤 대답을 할까 망설이게 된다. “어디니?”라는 말에는 “난 지금 너의 시간이 필요해.”라는 의미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함께 공유한 세월만큼이나 가족보다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막역한 사이였다. 그 세월 때문이었을까 지인은 늘 자신의 시간에 나를 마음대로 끼워 넣으려고 했던 것 같다. 갑자기 시간을 내라는 말에 바쁘다는 나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했고, 자신의 시간에 맞춰주기를 원하는 부담스러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궁여지책으로 핑계를 대곤 했었던 씁쓸한 기억이 있다. 이 시기를 떠올릴 때면, 나는 왜 소극적으로 피하기만 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오히려 미안함을 느끼기까지 했으니, 나를 인정해 달라거나, 적당히 거리 두기가 중요하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살다 보면 수많은 관계가 맺어질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 지속하는 관계들은 함께 즐겁고, 함께 성장해 나가며 서로 좋은 영향을 끼친다. 물론 모든 만남이 저울로 재는 것처럼 균형을 맞출 수는 없지만 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관계 앞에 위기가 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한다. 막심 만케비치의 <소울 마스터>에는 “<이 사람>이 아니라 <내 사람>이라고 말할수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당신 소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은 자유의지가 있기 마련이다. 사람은 자신이 선택하고 의도한 대로 살기를 바라며, 그런 삶에서 행복을 느끼는 존재이다. 그런데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 내 시간을 마음대로 쓰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바탕으로 한 존중과 신뢰는 아름다운 관계의 첫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누구도 소유할 수 없으며 소유 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이란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관계에는 적당한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상대가 원하지 않는 선은 넘지 않는 예의는 지켜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가 좋은 영향을 나누고, 긍정적이며 성장하길 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건강하고 행복한 관계를 위해서도 거리 두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과목이라생각한다. “어디니?”라며 전화를 하던 지인과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지만,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나의 불편해하는 마음을 알아봐 주었고, 나 역시 내 생각을 피하지 않고 말하기 시작했다.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아니라 관계 속에 있는 사람 모두 자기의 역할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편해진 관계가 있다 해도 필요 없는 자책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자책은 모든 판단을 흐리게 할 뿐 아니라 발전하는 관계를 만드는 데 걸림돌로 작용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자책이 아니라 서로의 자유로운 삶을 존중하는 마음과 건강한 관계 유지를 위한 안전거리를 확보하는 지혜일 것이다.